나이 얘기를 먼저 하는 건, 내가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다.
검사 결과를 듣고 병원 복도에 앉아 있는데 의자가 차가웠다. 엄마한테 전화할까 하다가 끊었다. 걱정시킬 문장을 아직 다듬지 못해서였다. 다듬다 보니 오늘이 됐다.
나는 대단한 계획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월세 내고, 친구 생일 챙기고, 겨울에 가습기를 청소하는 정도. 그 평범한 목록이 갑자기 소중해졌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름은 여기 적지 않겠다. 그 사람이 이 글을 우연히 보더라도, 나를 불쌍한 환자로만 기억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그냥, 복도에서 집에 가고 싶던 사람이다.
할머니는 약봉지를 반듯하게 접어서 서랍에 모으셨다.
나는 그게 아까운 종이를 모으는 버릇인 줄 알았다. 나중에 보니 그 안쪽에는 내 이름이 적힌 메모가 있었다. 학교 간식, 버스비, 그런 짧은 단어들. 날짜는 빼먹힌 게 더 많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그 서랍을 바로 비우지 못했다. 비우면 할 일을 다 한 것 같아서 미안했다.
고맙다는 말을 살아 계실 때 제대로 못 했다. 밥 더 먹으라는 말씀에 배부르다고만 했다. 지금 적는다. 그 밥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약봉지는 이제 접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 정성을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우리 손주.
네가 그린 그림에서 해는 파랗고 사람은 머리가 너무 크다. 나는 그 그림을 냉장고에 붙여 두었다. 자석이 약해서 가끔 떨어진다. 떨어질 때마다 다시 붙인다. 그게 요즘 내 일이다.
할아버지는 네 이름을 부를 때 끝이 올라간다. 너는 그걸 듣고 웃는다. 나는 그 웃음 때문에 무릎이 아파도 마중을 나간다.
오래 네 어른이 되어 주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이 그림은 네가 가져가라. 파란 해를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네가 본 그대로 그리면 된다. 세상은 어른들이 정한 색만 있는 게 아니다.
같은 팀이었지.
프로젝트 끝나던 밤, 우리는 편의점 라면을 책상에 놓고 먹었다. 국물을 키보드에 튀겼고, 너는 휴지로 닦으면서 내일 또 이러면 안 된다고 했다. 다음 날도 그랬다.
나는 너를 친구라고 부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회사 사람은 회사 안에만 있는 줄 알았다. 네가 퇴사하던 날 나는 송별 멘트도 제대로 못 했다. 잘가, 그 한 단어였다.
늦었지만 적는다. 그 라면이 나를 그 계절에 붙들어 줬다. 네가 지금 다른 회사에서 점심을 거르고 있다면, 거르지 마. 내가 못 지킨 걸 네가 지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이사 온 첫 주에 재활용을 잘못 내놓았다.
옆집 분이 나무라지 않고, 어떤 봉투에 무엇을 넣는지만 알려 주셨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분류했다. 그 뒤로 그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 이름을 정확히 부르셨다. 나는 그분의 이름을 세 번쯤 듣고도 잊어버렸다.
혼자 사는 집이라 아프면 티가 안 난다. 그분은 신문이 이틀 쌓인 걸 보고 초인종을 누르셨다. 나는 그냥 여행을 갔다 왔다고 거짓말했다. 사실은 일어나기 힘든 날이었다.
고맙습니다. 이름을 제대로 못 외운 채 이 글을 남기는 게 부끄럽다. 그래도 감사는 이름보다 먼저 도착해도 된다고 스스로 허락했다.
중학교 때 나는 숙제를 자주 안 해 갔다.
선생님은 혼내시기 전에 뒷문으로 나를 부르셨다. 복도에서,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고 했다. 사실은 집이 시끄러워서 책을 못 펼친 날이었다.
선생님은 더 캐묻지 않고 숙제를 다음 날로 미뤄 주셨다. 그 미룸이 나에게는 벌이 아니라 자리였다.
나중에 감사 편지를 쓰려고 교무실 앞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유치해 보일까 봐. 지금 보니 그 돌아옴이 더 유치했다.
선생님 덕에 나는 학교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이 문장을 이제라도 남긴다.
우리는 나쁘게 끝난 편은 아니었다.
다만 피곤하게 끝났다. 같은 말을 다른 날 반복했고, 누가 더 힘든지 경쟁처럼 되었다. 마지막 이사는 비가 왔고, 상자는 젖었다. 당신은 젖은 상자 밑을 수건으로 받쳤다. 헤어지는 날에도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미워하면 같이 산 시간까지 상할 것 같아서다. 새 사람이 생겼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가슴이 아팠지만, 축하까지는 못 해도 방해는 하지 않겠다.
당신이 행복하면 좋겠다. 이 문장은 깨끗하지 않다. 조금 남는다. 그래도 거짓은 아니다.
언니.
네 겨울 코트를 내가 입고 나간 적이 있다. 허락을 안 맡고. 너는 알고도 그 주에는 아무 말이 없다가, 다음에 단추 하나가 떨어진 걸 보고 한숨만 쉬었다. 나는 바느질을 못 해서 안전핀으로 고정했다. 너는 그걸 보고 웃었다. 화가 난 웃음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우리는 나이 차이만큼 멀리 살았다. 전화는 짧았고, 용건부터 말했다. 용건이 끝나면 둘 다 끊을 타이밍을 못 찾고 날씨 얘기를 붙였다.
언니가 아프다는 말을 늦게 들었다. 늦게 들어서 더 큰 소리로 걱정했다. 그 큰 소리가 미안하다. 코트는 가져도 된다, 가져도 안 된다, 이제 중요하지 않다. 언니가 따뜻하기만 하면 된다.
동생아.
네 등록금을 보탠 해를 나는 일부러 티 내지 않았다. 아버지가 네 통장에 넣은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어서, 봉투에 내 이름을 안 썼다. 너는 나중에 알고 전화를 했다. 목소리는 감사보다 미안함이 컸다. 나는 그 미안함이 싫었다. 형으로서 한 일인데 네가 빚처럼 지면 안 됐다.
너는 그 뒤로 명절마다 용돈을 주려고 했다. 나는 받았다. 안 받으면 네가 더 불편해할 것 같아서. 받은 돈으로 네 조카 신발을 샀다. 그건 말 안 했다.
잘 크고 있다. 이미 컸다. 형의 도움 없이 네 집을 유지하고 있지. 그것만으로 나는 그 봉투를 잘 넣은 셈으로 친다.
어머님.
결혼하고 처음 받은 반찬이 멸치볶음이었습니다. 저는 멸치를 잘 못 먹어서 통을 냉장고 뒤에 밀어 두었습니다. 다음 방문에 빈 통을 드려야 하는데, 내용물이 그대로라 통째로 다른 반찬을 담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들키진 않았지만 저는 알았습니다.
어머님은 제 서툰 설거지를 고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릇이 덜 마른 채로 겹쳐져 있으면 나중에 조용히 다시 닦으셨을 겁니다. 저는 그 조용함이 참 고마웠습니다. 잔소리로 배우면 제가 더 작아졌을 테니까요.
사랑한다는 말은 며느리로서 어색합니다. 그래도 적습니다. 저를 딸의 자리에 가까이 두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두 번 전화하셨다.
나는 회의 중이라 거절을 눌렀다. 끝나고 걸겠다고 메모까지 했다. 메모는 노트북 옆에 붙였고, 나는 다음 회의에 들어갔다. 하루가 저물었고,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아버지가 밤에 불편해하셨다고 말했다.
큰 싸움이 있었던 부자는 아니다. 오히려 싸움이 없어서 더 할 말을 미뤘다. 안부는 다음에 해도 되는 줄 알았다.
지금 누군가 화면에 아버지의 이름이 뜨고 있다면, 받으라고 적는다. 회의는 다시 열린다. 어떤 목소리는 다시 열리지 않는다. 나는 그 차이를 너무 늦게 알았다.
여보, 나는 간을 잘 못한다.
당신이 없으면 된장을 너무 많이 풀거나, 물을 겁먹어서 적게 붓는다. 당신은 맛보고 아무 말 없이 물을 더 넣었다. 그 침묵의 한 숟가락이 우리 집 맛이었다.
나는 요리를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냥 당신이 배고파하기 전에 밥을 차리고 싶었다. 일이 밀리면 배달을 시켰다. 당신은 배달 음식을 불평하지 않고, 빈 용기를 깨끗이 씻어 버렸다. 그 씻음이 나를 덜 미안하게 했다.
앞으로 누가 당신 밥을 챙겨도 나는 질투만 하지는 않겠다. 조금은 하겠다. 그래도 당신이 따뜻한 국을 먹으면, 나는 그쪽이 맞다고 생각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