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첩 세 번째 장
앨범을 처음부터 넘기지 마. 세 번째 장, 내가 눈을 감고 웃는 사진. 바다라기보다 방파제다. 바람이 세서 머리가 엉망이다. 그 사진이 나답다. 잘 나온 증명사진은 빼도 된다. 뒷장에 네가 낙서한 하트가 있다. 볼펜이 번졌다. 나는 그때 창피하다고 했지. 지금은 그 번진 하트가 앨범에서 제일 정확한 문장이다. 사진 말고 사람을 봐 줘. 나는 그 바람 속에서 네 옆에 있었다. 그거면 설명은 끝이다.
삶의 마지막에 남기고 싶은 말을 조용히 읽는 곳.
앨범을 처음부터 넘기지 마. 세 번째 장, 내가 눈을 감고 웃는 사진. 바다라기보다 방파제다. 바람이 세서 머리가 엉망이다. 그 사진이 나답다. 잘 나온 증명사진은 빼도 된다. 뒷장에 네가 낙서한 하트가 있다. 볼펜이 번졌다. 나는 그때 창피하다고 했지. 지금은 그 번진 하트가 앨범에서 제일 정확한 문장이다. 사진 말고 사람을 봐 줘. 나는 그 바람 속에서 네 옆에 있었다. 그거면 설명은 끝이다.
주전자가 식기 전에 당신이 잔을 두 개 꺼내는 소리. 그 소리가 우리 집의 아침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그 소리만 듣고도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내가 못 탔다. 손이 떨려서 물을 흘렸다. 당신이 휴지로 닦아 주면서 아무 말 안 했다. 그 침묵이 다정했다. 내일도 못 타면, 당신 잔만 꺼내. 빈 잔을 나란히 두는 의식은 사흘만 해 줘. 그 다음부터는 하나면 된다.
나는 약 이름을 자꾸 틀린다. 동생인 네가 더 또박또박 읽는다. 그래서 맡긴다. 엄마는 약 먹었냐고 물으면 먹었다고 먼저 대답하는 사람이니까, 네가 통을 확인해. 나는 엄마한테 공부만 강요한 날들이 있다. 동생인 너는 그 집에 남아서 저녁을 차렸다. 몫이 공평하지 않았다. 엄마 병원 갈 때 네 휴가를 내가 대신 못 내 준다. 그 빚은 말로만 남는다. 미안하다. 그래도 약 시간만은 부탁한다.
너는 표를 먼저 뽑았다. 나는 네 뒤에 서서 할인을 받을지 말지 화면만 봤다. 이별인데 화면을 보다니. 나는 그렇게 쓸모없는 곳으로 눈을 돌리는 사람이었다. 잘 지내라는 말은 너무 멀어서 못 했다. 붙잡자는 말은 너무 더러워서 못 했다.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했다. 네가 개찰구로 들어간 뒤, 나는 역 의자에 앉아 신발 끈을 다시 묶었다. 풀리지도 않았는데. 지금 문장은 이거다. 너를 미워한 계절은 짧았고, 그리워한 계절이 길었다. 다시 오라는 뜻은 아니다.
내 인생을 요약하지 마. 업적 목록을 만들면 빈칸이 많아 보인다. 나는 빈칸으로 살지 않았다. 장마철에 당신이 내 양말을 건조대 끝으로 밀어 주던 것, 아이가 문 앞에서 엄마를 두 번 부르던 것. 그 반복이 충분했다. 더 오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은 있다. 그래도 모자랐다고 쓰진 않겠다. 충분했다. 조문객들에게도 그렇게 말해 줘. 불쌍한 얼굴은 사절이다.
토요일마다 현관이 그 냄새였다. 나는 코를 막고 지나갔다. 아버지는 웃지 않았다. 붓으로 앞코를 문지르는 데만 집중했다. 한 번쯤 옆에 앉아 볼 걸. 붓을 같이 잡자는 말도 못 했다. 민망해서. 아버지와의 시간을 민망함으로 보낸 내가 아쉽다. 구두를 닦는 법이 사랑은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그 냄새를 집이라고 부르겠다. 아버지, 늦었지만 적습니다. 제가 그 집을 함부로 지나갔습니다.
휴대폰 밝기를 낮췄다. 당신이 소파에서 고개를 꺾고 잔다. 아이는 방문 틈으로 불이 새다 말다 한다. 길게 못 쓴다. 손가락이 느리다. 내일 아침 도시락 김은 네가 잘라 줘. 나는 늘 너무 크게 잘랐다. 아이는 그 큰 김을 남겼고, 나는 남긴 김을 먹었다. 그 남긴 김이 싫지 않았다. 깨우지 마. 이 글은 내일 읽어도 된다.
성적표 보고 내가 한숨을 쉰 날. 너는 방문 앞에서 그 한숨을 들었다. 나는 한숨이 너를 향한 게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다. 반은 거짓이다. 기대한 마음이 한숨에 섞여 있었다. 기대는 내 것이었지 네 짐이 아니어야 했다. 너는 네 속도로 이미 걷고 있었다. 내가 결승선을 먼저 그려 놓고 늦다고 한 거다. 미안하다. 이 단어 하나에 네 학창 시절을 다 담기엔 부족하다. 그래도 방향은 이것이다. 네 잘못이 아니다.
국화만 놓으면 내가 너무 착해 보인다. 나는 착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시장에서 흥정했고, 약속도 미뤘고, 농담이 가끔 세었다. 꽃은 노란 것도 섞어 줘. 내가 좋아하던 색이다. 비싸지 않아도 된다. 슈퍼 앞 양동이에 있는 거면 충분하다. 조문 온 사람들한테 밥 먹었냐고 물어 봐. 내가 살아 있을 때 그 질문을 덜 했다. 떠나는 날에라도 그 질문을 남겨 둔다. 웃어도 된다. 나는 그 웃음을 결례로 받지 않는다.
사료는 베란다 상자다. 위칸. 물을 먼저 갈아 주고 밥을 줘. 나는 순서를 자꾸 바꿔서 네가 잔소리했다. 네 순서가 맞다. 산책은 길게 못 해도 된다. 골목 끝 가로등까지만. 거기서 내가 항상 돌아섰다. 다리 때문이기도 하고, 집 불빛이 보여서이기도 했다. 나는 그 개를 남긴다기보다, 네가 저녁 일곱 시에 현관에 서 있는 모습을 떠올리고 싶다. 그게 내가 아는 내일이다.
여보. 나 없는 동안 집 열쇠 못 찾을까 봐 먼저 적어 둔다. 부엌 서랍 왼쪽에서 두 번째, 고무줄로 묶인 열쇠가 그거다. 가스는 잠그고 자. 나는 그걸 맨날 잔소리처럼 말했는데, 오늘은 잔소리가 아니라 부탁이다. 아침마다 당신이 먼저 일어나 주전자를 올리던 소리가 내 하루의 시작이었다. 거창한 말을 잘 못 해서 미안하다. 그냥, 당신 옆에 있었던 시간이 내 인생에서 제일 편했다. 너무 오래 집 안을 어둡게 두지 마. 커튼은 열어도 된다. 나는 그 햇빛이 좋았다.
당신한테 이 말을 얼굴 보고 해야 했는데, 글이 먼저다. 지난겨울, 내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설거지를 멈추고 고개만 숙였고, 나는 그게 더 화가 나서 현관문을 세게 닫았다. 밖에 나가 보니 눈이 오고 있었다. 십 분도 안 돼 다시 들어왔지만, 이미 당신은 안방 불을 꺼 둔 뒤였다. 당신은 예민했던 게 아니다. 내가 급했다. 급해서 당신의 말을 반쯤만 듣고 결론부터 냈다. 그 버릇을 고치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데, 고치기 전에 이 글을 쓰게 됐다. 용서는 당신이 정해도 된다. 나는 변명 대신 이것만 남긴다. 그날 문은 내가 잘못 닫았다.